불안

알베아크 캐붕주의 생각나는대로 씀 주의.

그때까지만 해도 한 번도 네가 가을을 닮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

너는 나를 볼 땐 항상 웃고 있었으니까, 네 연두색 눈을 봐도 그냥 기분이 좋아질 뿐이었거든. 차라리 가을보단 봄에 가까우면 모를까.

계기는 별 거 아니었어. 네가 무슨 이유에선지 열려있던 창가 자리에 앉았다가 심한 감기에 걸린 거야. 너도 알잖아, 가을 햇볕은 봄 햇볕하고 다른 거. 봄 햇볕이 앞으로의 확신을 준다면 가을 햇볕은 한없이 가벼워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느낌. 그 날이 유달리 추운 탓도 있었겠지?

너는 그 날로 입원해서 며칠 동안 검은 머리를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어. 그게 그렇게 특별하고, 그런 일은 아니잖아? 감기 때문에 조금 내 주변에서 사라져 있었다고 갑자기 내가 싫어졌다는 의사표시도 아니고 말야. 나중엔 네가 그 때 많이 보고 싶었다고 해주기도 했고.

그런데 그 날,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네가 가을처럼 어느새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릴 것 같은 거 있지. 네가 그럴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야 너는 나한테 같이 있어 주겠다고 약속도 했고, 그 때도 날 보고 싶었다고도 해 줬는걸.

그치만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가슴은 그렇지가 않았어. 계속 창가에 앉아 있던 네가 떠올랐어. 어느 순간 내 옆에서 사라져서 나는 없는 체 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두색 눈을 휘며 웃고 떠들며 행복해 할 거 같아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지만, 어느 날엔 차라리 네가 나랑만 얘기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단 말야.

그래서 그 땐 더 많이 너를 찾았다? 평소에 부르는 것보다 더 자주 부르기도 하고, 사실 아는데 모르는 척 하기도 하고...너는 나에게 난처한 듯이 웃으면서 말했어. 이 정도도 모르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근데 나는 그것 때문에 네가 나를 약간 멍청한 애로 생각해도 상관 없었어. 네가 더 오래 옆에 있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네가 내 전재산을 빼앗아가겠다 해도 괜찮았을 거야. 오히려 그 정도면 아주 싼 값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했거든.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별 거 아닌 거에 매달렸다, 그치?

그것 때문에 전엔 잘만 얘기하던 힘든 것들도 덜 얘기하게 됐어. 가벼운 것들은 전처럼 말할 수 있었는데 무거운 것들은 아예 말도 꺼내기 힘들었거든. 말하면 별 것도 아닌 걸로 우울해 한다고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웃기지, 처음 보고 또 다시는 안 볼 사람들한테 말하는 게 너한테 말하는 것보다 더 편해지게 됐었다니.

네가 걱정을 담은 표정으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줬을 때 있었잖아. 이게 맞는지, 과연 이렇게 하면 비극이 종결되긴 하는 건지, 몸은 피곤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기숙사 침대에서 눈을 감고 오래오래 자고 싶었는데, 너한테는 필사적으로 무너지는 몸을 세우고 그냥 아무 일 없다고 했어. 무서웠어. 네가 가을바람처럼 차갑게 변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거든.

결국 나는 그 다음 날 너처럼 몸살이 나서 사관학교를 며칠 빠질 수 밖에 없었지. 네가 와서 오늘 재밌었던 일이나 어서 낫길 바란다는 얘기를 했을 땐 정말 기뻤는데...가고 난 후엔 불안해졌어. 모래알을 손에 잡은 것처럼 이게 한순간의 행복이면 어쩌지 싶어서. 네가 없으면 내 인생이 나 홀로 남아버린 병실처럼 영원히 혼자가 될 것 같아서.

나도 내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어. 평범한 친구관계에서라면 이렇게 초조해하진 않잖아. 그 때에서야 깨달았어. 내가 너를 내 울타리 안에 집어넣으려고 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더 전전긍긍해 했어. 원인을 알았는데도, 아니, 어쩌면 알아서 그랬는지도 모르지. 내가 잃어버리면 견디기 힘들 애정을 준 건 너밖에 없었던 거야. 너를 끔찍이도 아끼고 있었던 거라고. 네가 나와 틀어질지도, 누구 하나가 먼저 전장에서 죽어버릴지도 모르는데.

한 번 네게 이런 걸 말한 적 있었지. 네가 그랬어. 그럼 죽지 않게 더 열심히 훈련받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내가 너를 싫어할 이유같은 건 없으니까 안심해도 괜찮다고.

그치만 너도 알다시피 전쟁에 자비란 없잖아. 좋은 전쟁과 나쁜 평화가 그렇듯이 말야. 네가 떠나면 난 어떻게 살아? 그대로 속절없이 무너져내려야 하는 거야? 안 죽는다 해도 말야, 내가 싫어지면 어떻게 해? 나는 너를 절대 못 싫어할 테니까, 우리가 멀어진다면 네가 나를 싫어하는 것 밖엔 없잖아.

...난 네게 확신을 원했던 거였어. 너는 나를 떠나보내도 괜찮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었거든. 한때 내 모든 첫번째가 너였듯이 네 모든 첫번째도 나이길 바랐던 거야. 그래. 내가 너를 죽을 만큼 사랑했다고. 다시는 이런 애정 없을 만큼 네가 소중했다고. 가을같이 떠날 너를 부딪혀 깨져버리더라도 붙잡고 싶을 만큼 간절하다고......그러니까 너도 나를 사랑해 달라고 하고 싶었던 거야, 알베르.

나는 그럴 용기같은 건 없었지만......


퇴고거의안함 의식의 흐름......이런 아크가 보고싶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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